THIS OR THAT
이것이냐 저것이냐 [청년작가 展 ]

2021.9.15~9.26  무우수갤러리 3-4F


Shouting

in Whispers



무우수갤러리 학예실장 양효주


“그때는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을 향하는 동시에 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찰스 디킨스의 유명한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도입부이다. 

이름 짓기 힘든 욕망과 해갈되지 않는 의구심과 근사하다는 말로는 턱없이 모자란 매혹 속에서 오늘날의 청년들은 희망도 절망도 없이, 혹은 희망과 절망이 범벅 된 채로 살아간다.

마치 누군가가 쳐 놓은 덫처럼 ‘나’의 꿈으로 이르는 문은 활짝 열려 있고 세상의 모든 목소리가 가거라! 하며 

‘나’의 등을 떠밀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장벽처럼 가로막힌 거대한 암흑뿐이다.

두려움보다 더한 막막함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회의에 찬 생각들. 대관절 무엇이 우리를 안정시켜 줄 수 있는가? 세계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 마르크스와 인생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 랭보. 이들의 구호는 어째서 이리도 허망한 것인가?

극단적으로 모호하며 무력한 상태들이 불안하게 교차한다. 강박적이고도 억압된 욕망이 상이한 정체성과 히스테리컬하게 뒤섞인다. 

그런데도, 날마다 절망하면서 날마다 희망을 잃지 않는 건 왜일까? 차마 문턱을 넘어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면서도 매번 문 앞에 다시 서는 이유는 뭘까? 

세속과 유토피아 사이를 무한 “순환”(조아해)하는 일,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가도 “꿈꾸는 자를 위한 자리”(박세빈)에 앉아 조용히 꿈을 키우는 일, 남아도는 비닐봉지 마냥 잉여스럽게 나뒹구는 순간에도 가슴 한편에 밝은 “달”(최단미)을 품는 일, 세파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단단한 개인”(한혜수)을 세우는 일......  

설사 모든 게 미궁 속이라 해도 어떤 분명한 실체가 있음을 확인하고픈 열망과 의지가 아닐까? 이를 단단히 붙잡고야 말겠다는 믿음의 제스처로서.


Voice 1. 조아해


“나는 와유(臥遊)를 담은 작업을 한다. 육체를 벗어나 정신적인 노닒, 곧 해방을 말한다.

자연이라는 소재를 통해 임의적인 공간을 내가 만들어 냄으로써 (…) 보이는 게 다가 아닌 삶에 대하여,

그리고 나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작가의 노트 중에서).


조아해의 <욕망>은 각종 신상품과 명품에 대한 흥분 속에서 정신없이 소비하는 삶을 보여준다. 가방이며 자동차며 보석이며 시계며, 이 달콤한 욕망의 대상을 손에 쥐기 위해 –초콜릿 플레이크의 모습으로 표준화된-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르고 줄기차게 미끄러진다.

반면 <그리고 바라던 그곳에서Ⅰ> 의 풍경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눈 앞에 펼쳐진 산 좋고 물 좋은 광경은 흡사 안견의 <몽유도원도>처럼 꿈결 같지만, 풍류를 즐기며 한가로이 노니는 사람들은 도통 보이질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의 존재론 -자의식 과잉의 발현으로 볼 수 있을- 이 “나는 보여진다. 고로 존재한다”라면, 그림으로 대변되는 자아상은 남들 보다 돋보이려고 애쓰지도 또 시끄럽게 굴지도 않는다. 다만 군중 속 안락함의 유혹에서 벗어난 단독자의 고독과 자유로움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적이 귓가에 따라붙는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는 것이거늘.

Voice 2. 박세빈


“뜨거운 낮, 해가 점점 저물어 밤을 향해가는 시간, 그 속을 스쳐가는 색감의 변화와 모호해지는 풍경은

양가적인 것들에 혼란스러워하는 청년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정반대되는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모순되는 생각들로 고민을 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 (…)

어쩌면 그 자체로서 우리는 존재하는 게 아닐까?”(작가의 노트 중에서).


모네의 그림이 웨딩케이크처럼 달콤하고 찬란하게 부서지는 빛이라면 박세빈의 그림은 명료하고 견고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호퍼의 빛을 담고있다. 

작품 <멈춰선 이에게>, <흘러간 자의 비상> 에 흐르는 황혼의 붉은빛은 사물의 곧은 직선을 더욱 뚜렷하게 한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정연함 탓에 조금 황량한 듯도 하지만 가지런함이 주는 균형감과 안정감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림이 자아내는 심란하고 기이한 정서는 초현실주의 미술의 핵심 정서인 언캐니(Uncanny: 낯익은 것에서 느끼는 낯선 감정)의 감정마저 유발한다. 마치 인과율을 떠나 우연히 놓인 사물처럼, 잘못된 시간과 잘못된 공간 속에서 타인과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엉겨 붙는 느낌이다. 

그러나 해 질 녘, 굳게 셔터를 내린 세상은 슬그머니 비밀의 게이트를 연다. 작품 <내일을 향한 숨>, <Imagine>처럼 마술적인 순간이 스르륵 펼쳐지는 것이다. 그 앞에 선 우리는 특별히 허락된 기적의 목격자가 된다.

Voice 3. 최단미


“현대인이 가지는 막연한 그리움, 그 부재의 정서로부터 달 그림은 시작되었다. (…)

우리는 무언가 빠져있는 것 같은 결핍의 감각에서 한시도 자유로운 적 없다. 어쩌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이란 영원한 결여태라는 것을.”(작가의 노트 중에서).


최단미의 그림은 우리가 편집증적으로 항상 붙잡는 물음들, 즉 ‘삶과 죽음’, ‘나는 왜 존재하는가’와 같은 실존주의적 질문을 던진다. 

작품 <Thrown>을 보노라면 얼른 ‘잉여 인간’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길가에 구르는 비닐봉지처럼 하찮고 흔해 말 그대로 함부로 던져진 존재. 사르트르가 즐겨 쓰는 말대로 “비자 없는 생활을 영위했고 존재 허가증 없이” 존재하는 인생 말이다. 이 멜랑콜리아의 정서는 생멸에 대한 사색을 키우며 정물화로 이어진다. 특히 최단미의 묘사 기량은 정물화에서 더욱 돋보이는데, 그의 정물화 시리즈 <Our (still) life I, Ⅱ> 는 실제로 착각할 정도로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그 중 <Our (still) lifeⅡ>는 트롱프뢰유(Trompe l’oeil 눈속임) 기법으로 그린 카라바조의 최초의 정물화 <과일바구니>를 모본으로 한다. 상징성이 짙은 바로크의 그림이 그러하듯 풍성한 과일과 시들어 버린 잎의 공존은 삶과 죽음의 찰나성과 인생의 무상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달이 숨어 있다. 그러고 보니 비닐봉지가 나뒹구는 풍경에서도, 텅 빈 사발 위에도 언제나 달이 있는게 아닌가? 

달, 그것은 상실한 모든 것들을 다시 찾고 끊어진 모든 것들을 다시 연결하고픈 소망의 발현일까? 어쩌면 작가의 간절한 기도가 쌓이고 쌓여 저 큰 보름달로 차오른 것은 아닐는지. 

Voice 4. 한혜수


“치기 어린 마음으로 모든 걸 다 알 것 같다가도 믿었던 세계가

전부가 아니었음을 경험하는 것이 청년의 시기인 것 같다. 더욱이 혼란스러운 재난과 과다한 정보에

서로를 헐뜯고 편 가르는 모습이 일상이 되었다. (…) 각자의 입장에서 진리라고 믿는 것들이 부딪히고 파도가 되어

개인의 생각을 휩쓸어간다.”(작가의 노트 중에서).


혹 세계의 변화 속도에 자주 멀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한혜수의 그림에 깊이 빠질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세상살이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해 낙오되거나, 물결치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의 지표를 잃고 혼란을 겪는 사람이라면 정녕 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대관절 나는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가? 작품 <속내>는 이렇게 묻는 것만 같다. 

설령 한 자리에 머물고 싶다 해도 맘처럼 되는 것도 아니다. 제아무리 굳건한 의지를 다진다 해도 변화의 물결에 속절없이 떠밀리기 일쑤이다. 더욱이 시류를 거슬러 헤엄쳐나가는 일은 큰 위험을 각오해야만 하지 않은가. 

아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타자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개인>이 되는가? 

땅이 물렁물렁하면 그 위에 세워진 어떤 건물도 견고한 안전성을 확보할 수 없듯이, 급변하는 시대를 발판으로 나 자신을 세우는 일은 요원해 보이기만 하다. 

그럴 때 우리는 전능한 절대자에게 매달려 보기도 한다. 그분께 간절히 <구원>을 간청드린다. 

그러나 이내 회의가 든다. 이 모두가 정녕 믿음에 달린 일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카프카의 말을 빌려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아무 구원도 오지 않더라도, 나는 언제라도 구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