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추상회화의 거장, 지홍 박봉수 회고전

2021.3.4~3.28, 무우수갤러리 3-4F

지홍 박봉수, 그의 수묵 세계를 견취見取하다.


- 무우수갤러리 대표, 조수연


어느덧 남쪽에는 노란 유채가 피고, 매화도 망울을 터뜨렸다고 한다. 아무리 엄한 추위도 봄볕을 이길 수 있으랴. 그렇게 황량한 들빛도 푸르러지고 자연의 섭리는 새로운 세상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런 즈음... 문득, 지홍 박봉수 화백의 수묵을 만나고 마음속에는 더욱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다가왔다. 깊은 땅속에 생명을 숨기듯 감춰졌던 깊은 수묵화의 세계가 새롭게 떠오르는 것처럼 벅찬 기대와 흥분... 그럼에도 벗어날 수 없는 무거운 마음의 부담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처음 지홍 선생의 작품을 만났을 때, 뜻 모르게 흐르는 에너지를 느꼈었다. 색은 따스하고 깊었으며 무한한 심연深淵을 담고 있었다. 굵은 붓으로 그려낸 세계에 숨겨진 필력과 완성도는 짧은 시간에 이루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능이 있어서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온전한 작가정신과 숙련된 붓놀림이 깊은 내관內觀으로 합일된 작품세계를 굳이 설명하려니 그야말로 사족蛇足에 불과하였다.

다시금 지홍에 대한 이런 저런 글들을 읽어가며 많은 생각과 감정이 무겁게 교차하였다. 아울러 내가, 아니 우리가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마저 들었다.


간혹 우리는 지홍이 정규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1930년대의 제한된 제도권 교육에 편입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지홍을 평가하기에 인색해야 한다면 매우 다행스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한한 정신세계, 화가의 작품세계가 제도권의 시각으로 재단되고 평가되어야 한다면 지홍은 소외되어도 좋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넓은 미술시장을 갖고 있는 유럽이, 당시 세계 화단을 이끌어가던 유럽이 지홍에게 찬사와 경의를 표하고 그의 작품이 복제되어 유럽 전역에서 공유되었다. 왜 그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의 작품 세계를, 소재마저 낯선 동양의 이름 모를 화백을 초빙하고 작품을 소장하려고 하였던가.


그래서, 이렇게 지홍을 만나고 작은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인사동에 자리한 무우수미술관은 지홍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자 한다. 우리에게는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운 지홍이 있다. 구도求道를 위해 전 세계를 외로이 누비던 화가 지홍... 그가 오늘 인사동에 다시 온다. 오늘 함께 뜻을 나눌 이들과 다시 그를 만나고 싶다.


이제 새봄이 오는 때, 노랗고 예쁜 꽃처럼 지홍도 다시 피어나리라는 무한한 기대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그의 작품을 견취見取하고, 향유하고자 한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지홍의 예술적 고뇌를 함께 나눌, 우리 미술에 무한한 애정을 가진 이들과 지홍의 세계를 걷고 싶다.



수묵과 채색의 변주, 지홍 박봉수의 추상 회화

- 송희경(문학박사,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초빙교수)


‘새로움’을 모색한 동양화가, 박봉수 

‘새로움의 모색’은 창작을 하는 모든 예술가에게 부여된 가장 어려운 명제이다. 특히 지필묵이라는 거대한 전통을 짊어진 동양화가들에게 이 명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마루와 같은 과업일 것이다. 지홍 박봉수(智弘 朴奉洙, 1916-1991)는 쉽지 않은 과업을 독자적으로 성취한  한국미술계의 거장이다. 평생 동양화의 기본 필묵법을 간직한 채 ‘새로움’을 모색하며 신선한 창작 세계를 펼쳤기 때문이다.


박봉수는 일제강점기에 경주 사정동 국당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지만 근대기 국내에 형성된 유명 사숙이나 정규 미술 교육에 참여한 바 없다. 다만 10대 후반 일본으로 건너가 고다마 기보(兒玉希望, 1898-1971)에게 잠시 받은 그림 수업과 20대 초반 북경미술학원의 수료가 그가 수학한 미술 교육의 전부다. 청년이 된 박봉수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차지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해방 직후에는 경주에 머물며 근화여자 중학교 교편을 잡았으며, 경성과 해외를 오가며 그림을 발표하였다. 


박봉수는 이른바 국전을 비롯한 미술계의 제도권에서 활동하지 않은 탓에 지방화가, 재야 화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전시나 미술 단체에 참여하며 창작자로서의 입지를 견고하게 다진 동양화가다. 늘 ‘새로움’을 모색한 박봉수의 행보는 그가 참여한 전시회 목록에서 입증된다. 먼저 기억해야 할 전시가 바로 <현대작가 초대미술전>과 <백양회>다. <현대작가 초대미술전>은 “기성 권위에 도전하는 젊은 작가들의 움직임”을 내세우며 서양화, 동양화, 조각 등이 모두 전시된 행사였다. <백양회>는 “침체된 동양화의 발전과 후진 양성을 위한 주춧돌의 역할을 하기 위해” 발족된 동양화가들의 모임이었다. 


1957년에 발족된 <현대작가 초대미술전>과 <백양회>는 관전인 국전에 대항하는 ‘야전’의 성격을 표명하며 전개되었다. 그리고 현 학계에서 한국 현대 미술의 출발점이 된 사건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박봉수가 두 전시에 참여하였음은 국내에서 화가로서의 입지가 얼마나 견고했는지 알려주는 행보다. 박봉수는 당시 미술계의 화두였던 ‘동양화의 현대성’을 실현하기 위해 수묵과 서체가 결합된 추상화를 출품하였다. 또한 두 전시에서 보여준 완숙한 조형성을 확장하여 일본, 미국,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거나 그룹전에 동참하여 해외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1970년대에는 국전에 참여하지 않은 재야 중진 동양화가들의 모임인 <대한미술원>에 참여하여 “화풍, 파벌, 인맥, 지역을 초월하여 …오직 예술 활동에만 정진할 것”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 국전이 폐지된 후 이어 신진 작가의 발굴을 위해 창립된 <대한민국미술대전>의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나아가 1981년 한독 미술협회 회원, 1983년 프랑스미술협회(ADAGP) 정회원으로 선출되는 등, 해외에서도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나갔다. 



수묵과 채색의 경계를 넘나드는 추상성 

이번 무우수 갤러리 전시에는 모두 10 여점의 작품이 출품된다. 박봉수의 ‘새로운 모색’이 시작된 해방 이후의 그림들이다. 먼저 작품 제목을 읽어본다. <고문견취(古文見取)>, <바람>, <산기의 암소>, <무궁동(無窮動)>, <탈춤>, <환원의 생명>. 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이며, 그윽하면서도 산뜻하다. 이제 작품을 살펴볼 차례다. 해방 이후 우리의 동양화단은 당시 미술계의 직면 과제였던 ‘민족성 수립’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담론과 창작 방법을 제시하였다. 특히 왜색을 탈피하고 시대성을 모색하기 위해 대담한 운필(運筆)을 활용한 수묵을 주로 구사하였다. 이러한 창작 경향은 동양화의 현대성 모색이라는 화두에 힘입어 추상성 탐구로 연결되었다. 


박봉수도 시대적 흐름에 힘입어 중봉을 활용한 사물의 재현과 화면의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오랜 기간의 연마한 기술과 탁월한 감각이 동시에 갖추어져야 가능한 추상화다. <고문견취(古文見取)>에서는 오로지 농묵의 힘찬 붓질 몇 번만 목격될 뿐이다. 먹이라는 물성에서 파생된 파필(破筆)과 발묵(潑墨)은 현색(玄色)의 절정을 보여주며 화선지의 소색(素色)과 강렬한 흑백 대비를 이룬다. 이러한 그의 창작 방식은 명말 청초의 승려 화가인 석도(石濤)가 언급한 ‘일획론(一劃論)’으로 해석 가능하다. 아무것도 없는 빈 화폭에 작가가 일획을 긋는 순간, 빈 화면은 카오스(chaos)에서 코스모스(cosmos)로 전환된다. 그리고 “일획이 모든 존재의 근본이요, 본 모습의 근원이고, 일획으로 그 형상을 드러내지 못함이 없음”이 실천된다. 석도의 화론이 박봉수의 화폭에서 발견되는 순간이다.     


<바람>, <산기의 암소>, <무궁동(無窮動)>, <탈춤>은 자유분방한 획의 향연이다. 짙고 옅음, 가늘고 두터움이 공존하는 필선을 빠르게 그어 율동감 넘치는 화면을 창출하였다. 게다가 은은한 담묵을 물들인 오묘하면서도 섬세한 먹색이 획과 어우러져 역동감을 더하였다. 특히 <무궁동>에서 활달한 곡선이 만든 형태는 춤추는 사람 같기도 하고 익살맞은 호랑이의 얼굴 같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길이의 빠른 악구를 반복하는 기악곡(器樂曲)을 뜻하는 ‘무궁동’의 함의가 시각화 된 셈이다. 이러한 박봉수의 붓질에서 -장자- 「양생주」의 <포정 이야기>가 연상된다. 오랜 숙련 기간을 거치고 온 몸에 힘을 뺀 채 자연에 모든 것을 맡겨야만 가능한 검객의 춤사위가 화면 가득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박봉수의 조형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동료가 바로 수화 김환기다. 김환기는 박봉수의 발상이 명상으로 이룩된 ‘도(道)’의 추구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미분화된 혼돈에서 추상적 묵혼(mass)을 드러내고 의도적 형상을 완성하는, 즉 질서에 따라 형상이 분화되는 과정을  높이 평가하였다. 석도가 언급한 “법이 없음을 법으로 삼는” 무법이법(無法而法)의 개념을 박봉수의 그림에서 발견한 것이다. 

    

물론 박봉수가 수묵 추상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해방 직후의 동양화단이 터부시 하는 채색을 적극 활용하였다. 동양화 영역에서 채색은 왜색, 민족색 등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결부되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늘 수묵과 비교되면서 정신성이 결여된 천박하고 속된 표현인양 금기시하였고, 한국적 정서와 맞지 않은 감성이라고 외면당했다. 그러나 색이 주는 매력은 무한하다. 사물의 고유한 색상에 빛이 부여한 변화까지 더해지면 수묵에서 절대 느낄 수 없는 세련된 감각과 오묘한 감정이 전달된다. 


박봉수가 시도한 수묵과 채색의 혼용은 당시 동양화단에서 쉽지 않은 창작 방식이었다. 박봉수도 처음에는 수묵 위주에 일부 담채가 가미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점차 원색 위주의 화려한 색상을 풍부하게 사용하였다. <금장천과의 대화>는 검푸른 색상이 은은하게 변화하는 바탕에 꼬불꼬불한 기호를 가득 배치한 올 오버(all over)의 평면이다. 등가로 펼쳐진 기호는 문자 같기도 하고 특정 사물의 형상 같기도 하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다양한 물성을 도입하여 마, 한지, 금지 등에 유화 채색을 얹기 시작하였다. 한지를 선염하는 수묵 담채가 아닌, 다양한 바탕 재료에 유화 채색을 바르되,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도안적인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금으로 된 획과 그윽한 바탕색만으로 완성된 <서경>은 장식적이면서도 우아하고, 화려하면서도 중후하다.   


박봉수는 평소 “진정한 그림은 소재와 대상에 따라 적합한 표현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봉수 창작 방식의 진폭이 매우 크고 무한한 까닭일 것이다. 이러한 조형성은 예사롭지 않은 성격과 기이한 행동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시인 구상은 “수묵 담채의 반가상을 그리는, 거미처럼 비쩍 마르고 검은 사내”로, 경주의 어떤 지인은 갑자기 잠적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고, 자연과 대화를 나누며 인간을 탐구하는 기인으로 그를 기억하였다. 방랑과 고집으로 점철된, 그리고 시류와 타협하지 않은 성격이 오롯이 화폭에 투영된 것이다.  


이렇듯 박봉수는 화선지의 번지는 특성을 십분 살려 농묵과 담묵을 적절히 활용하고, 순간의 붓놀림으로 예상치 못한 형상성을 연출하였다. 또한 화려한 색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물성을 도입한 콜라주까지 선보였다. 수묵과 채색의 경계, 직선과 곡선의 경계,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평면을 창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박봉수를 거장이라 명명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