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무우수갤러리 단체기획전

조선의 만화경, 단청


일시 : 2025.0205 - 0303

장소 : 무우수갤러리 / 인사동길 19-2  와담빌딩 3,4F

시간 : 10:00 - 18:00 / 무료전시



조선의 만화경, 단 청



 단청은 전통건축에서 부재 표면에 칠을 함으로써 목재의 부식을 막고, 한편으로는 건축물을 더욱 장엄하게 보이게 만드는 기능을 지닌 장식기술이다. 서양에서도 건축에 채색을 사용했지만, 주로 건축에 딸린 조각상에 채색을 하거나, 단색조로 외부 벽면을 칠하고 내부에 지금은 벽지를 바르는 것처럼 색을 칠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동양건축처럼 내외부 거의 전면에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장식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동양에서도 모든 건축을 이렇게 채색했던 것은 아니고, 주로 궁궐건축이나 종교건축에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당시에는 안료가 매우 비싼 재료였기 때문에 건물 전체를 단청으로 마감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런 단청을 단순히 지금의 벽지 디자인 정도로만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물론 벽지 디자인도 중요하다. 윌리엄 모리스의 벽지 디자인은 예술작품이라 할만한 것들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단청은 예술이라기 보다는 도배지 바르는 작업 정도로만 인식되는 듯하다.


 물론 단청없는 건물은 있어도, 건물없는 단청은 없기 때문에 단청은 늘 건축에 부속된 일부분으로서 그 독립성을 인정받기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나아가 단청문양이 대부분 기하학적 모양이다 보니 사찰벽화와 같은 예술작품으로도 인식되지 못했던 것이다. 동양 전통미술에서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대부분 부수적인 용도였으니 예술로 보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지금도 그래야 할까?


 이제는 추상미술이 유행하는 시대에 기하학적인 도안을 단순히 건물 치장용 마감재로만 인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단청의 도안이 얼마나 현대의 기하학적 추상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발견하고 건축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때이다. 그런 면에서 오스트리아의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 1928~2000)의 작품은 단청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 현대적 계승이라 부를 만하다. 특히 환경을 그토록 중시했던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이 단청을 닮았다는 것은 단청에도 이미 그런 정신이 들어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훈데르트바서는 직선을 끔찍이 싫어했고, 단청에는 그와 반대로 직선도 사용되고 있어 전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원래부터 이 둘이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단청을 훈데르트바서의 시각으로,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을 단청의 시각으로 서로 교차하여 비교해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박일선의 작품은 단청과 훈데르트바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시이다. 마치 현대물리학에서 사물 자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둘러싼 공간이 휘어있기 때문에 사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는 이론처럼 박일선의 작품들은 배경의 중첩된 색색의 선들을 통해 사물의 움직임이 아니라 공간 자체의 움직임을 포착한 것 같다.


 이들 작품들은 언뜻 딱딱한 기하학적 형태를 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때로는 뻗어나가는 것처럼, 때로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미술을 오늘날 ‘옵티컬 아트’라고 부른다. 빠키의 작품은 그런 독특한 시각효과를 통해 무한, 반복, 움직임을 넘나들며 반복적이면서도 부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고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는 평범한 도시인들의 정서를 역동적으로 담아냈다. 때로는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모빌이 이제 막 새로운 움직임으로 변화하려고 하는 듯한 설치작품도 인생의 줄다리기를 하는 평범한 우리의 모습을 닮았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그 색상의 표현이나 기하학적 구도가 단청과 닮았다.


 지금까지 단청은 거대한 건물에 들어가 있어 그 문양만을 집중해서 보기가 어려웠지만, 안유진, 황대곤, 이채오, 조혜영의 작품을 통해 비로소 단청의 본모습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다. 그렇게 작품들을 자세히 보면 안이나 밖으로 무한히 확장되거나 수렴되는 것을 반복하는 운동감이 느껴진다. 이제는 독립적으로 표현된 단청문양들은 그대로 완연한 만다라가 되었다. 요즘은 이런 표현을 모두 컴퓨터 그래픽으로 더 실감나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CG 기술이 없던 시절에는 실제로 변화하는 영상을 만들 수 없고 다만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표현이 유일한 방법이었던 셈이다. 비슷한 개념에서 만화경도 있었는데, 단청은 이런 만화경이 발명되기 전부터 이미 만화경과 같은 세상을 보여주려고 했던 원시적인 시도였던 셈이다.


 이번에 <조선의 만화경, 단청>에 참여한 작가들은 단청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만화경과 같은 성격을 잘 이해하고 이를 현대적인 기법으로 재구성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우물반자나 대들보의 양끝단에 사용되었던 이러한 단청도안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쩌면 실제의 공간보다 더 확장되고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통해 마치 살아있는 공간 같은 느낌을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CG는 전원을 공급해야 하지만, 단청은 전원공급도 필요없다. 오로지 그 자체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스스로 그렇게 살아있는 ‘자연’처럼 말이다. 훈데르트바서가 건축이나 미술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결국은 ‘생명’이었다 보니, 미시세계의 아메바처럼 꿈틀거리는 생명을 건축이나 캔버스에 옮겨 놓은 듯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우리는 비록 단청이 왜 저런 모습을 하게 되었는지 남겨진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그 의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


 불교건축에서 이렇게 무한히 확장되는 세계는 당연히 부처님의 세계인 불국토를 암시할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유한하지만, 불국토는 영원한 것이다. 그 영원함을 이렇게 순환적인 형태로 재구성한 셈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런 단청은 꼭 불교건축이 아니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마치 만다라가 미술치료에도 활용되는 것처럼, 잠시 이 신비로운 만다라 단청 작품을 보며 무한의 세계에 빠져들어갔다 나오는 것만으로도 바쁜 일상을 보내는 우리에게 일종의 정신적 호흡이 되어 줄 것 같다.


 한편 정선희, 양상훈의 작품은 단청이 지니고 있는 이 생명력이 실제 생명체에 투여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일반적인 생명은 모두 유한한 것이지만, 이들 단청을 머금은 생명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영원한 존재처럼 다가온다. 그런 가운데 정선희는 단청의 움직임을 만화적 움직임으로 재해석했고, 양상훈의 <까지호랑이>와 <백화난만>은 호랑이와 꽃이지만 마치 이 둘이 같은 존재인데 서로 변신한 모습인 것처럼 닮았다. 단청에서의 색채의 변화를 공간적 변화가 아니라 시간적 변화를 나타내는 문법으로 바꾼 것이다. 이런 특징은 이영희의 <붉은 단과 푸를 청 사이>에서도 읽을 수 있다. 마치 ‘단’과 ‘청’이 음양이 변화하듯 서로 변화하는 시간적 움직임으로 단청을 풀이했다.


 나아가 단청의 변화가 만화경처럼 평면에서의 변화라면 양해웅은 이를 입체적 변화로까지 밀고 나갔다. 마치 커다란 <동서남북 종이접기>를 연상케 하는 형태가 단청의 색채로 인해 접히고 열리는 운동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시를 느낀다.

여기에 더하여 황두현은 <trace>에서 무한히 확장하는 단청의 이미지를 블록화시켰다. 같은 모양을 반복해서 결합하여 무한히 확장되어 가는 레고 블록을 통해 단청 역시 색색의 블록 놀이의 하나임을 알려주는 것 같다. 우리는 단청을 늘 위에서 보지만, 만약 옆에서 본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는 CG가 난무하는 시대에 더 이상 이런 정지된 움직임은 한물 간 옛 방식일 뿐일까?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것에는 움직임이 없다. 즉,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것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러나 단청은 움직임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 그 자체이다. CG가 외부적인 힘에 의한 움직임이라면, 단청은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운동의 색채적, 형태적 원리인 셈이다. 예술은 결과가 아니다. 예술은 원인이다.

 

주 수 완 (우석대학교 예술경영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