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무우수갤러리 

황체상 초대전


일시 : 2024.1129 - 1216

장소 : 무우수갤러리 / 인사동길 19-2  와담빌딩 3,4F

시간 : 10:00 - 18:00 / 무료전시



황체상의 “숨은 불화 찾기”

 

  기본적으로 불화와 단청에서 출발한 황체상 작가는 전통적인 불교미술의 기법과 소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표현되는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기법적인 면에서는 너무도 완숙한 전통불화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지만, 무엇을 그렸나 보면 “이 작품들도 불화인가” 싶다. 하지만 황체상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불화의 기법은 불화에만 쓰여야 하는 것인가?”


  작품 속에서는 우주인이 단청풍선을 들고 유영하고 있다거나, ‘금문’이라고 하는 직조된 듯한 단청문양 안에 캐릭터화된 십이지의 얼굴이 숨어있다. 십이지 자체는 물론 불교미술에도 사용되어 왔지만, 이렇게 그 자체가 중심이 되어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고, 또 이들 작품 속 십이지의 모습은 우리가 전통미술에서 보아온 십이지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그런데 이들 <십이지단청>을 자세히 들여다 보자. 예를 들어 소슬금문을 바탕으로 하는 호랑이의 경우, 얼굴 부분만 색을 다르게 칠하고, 살짝 윤곽을 넣어 호랑이의 특징을 분명하면서도 귀엽게 포착하고 있다. 전통기법이지만, 이런 패턴화된 모습을 보면 마치 소슬금문을 구성하는 삼발이 모양의 도형이 디지털 숫자의 한 마디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디지털 숫자는 기본적으로 ‘8’이라는 숫자를 구성하는 마디들 중에 어디를 끄고, 어디를 켜느냐에 따라 0에서 9까지의 숫자를 만들어낸다. 알고 보면 단청 속에 숨은 십이지도 별개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전광판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색상이 달라지는 범위를 다르게 하는 것에 따라 십이지 각각의 얼굴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마치 금문 단청 안에 이미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들도 서로 다른 개개의 인간이지만, 누구나 그 안에는 부처를 품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더 쉽고 귀엽게 표현했다고 불화가 아닐까? 그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는 듯, <천상천하유아독존>에서는 단청문양이 탄생불도 품고 있다.


  우주인의 모습도 그렇다. 우리는 전통적인 불화에서는 날아다니는 비천의 모습을 자주 보아왔다. 하지만 원래부터 천상의 존재들이라 그저 그러려니 한다. 그러나 인간은 날고 싶은 꿈을 비록 직접 날지는 못하지만, 비행기라는 도구를 만들어 실현했다. 부처가 되는 것도 우리는 늘 꿈을 꾸고 있지만, 정말로 부처가 되고는 싶었을까? 어쩌면 부처가 되는 것은 너무 멀고 멀 길이라, 그저 노력하고 있다고 이야기만 할 뿐, 사실은 포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중생의 꿈> 속 우주인은 그냥은 날지 못한다면 우주복이라도 입고 날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이 풍선이라도 괜찮다. 꿈만 꾸던 비천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수행자가 이 우주인이다. 부처가 되는 흉내라도 내보려는 것이다.


  동서양의 사유상이 마주 보는 듯한 두 점의 작품은 <상상(相想)>이란 제목을 지니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상상하다’할 때의 “상상(想像)”이 아니다. 상상한다는 것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작업이라면, 이 작품 속 “상상”은 마주하여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국의 반가사유상과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둘은 각각 삶과 죽음을 상징한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 지옥의 문에 속한 조각이니 여기서는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반가사유상과 생각하는 사람을 비교하여 반가사유상을 “한국의 생각하는 사람”으로 소개하는데, 여기서 아예 이렇게 직접 마주하게 하니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제목을 통해 작가의 의도가 읽힌다. 이들의 생각은 사실은 마주한 상대방에 의해 생긴 것이다. 삶을 생각하는 반가사유상은 죽음을 바라보며 떠오른 것이 삶이고,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삶을 바라보며 떠오른 것이 죽음인 셈이다. 서로 다르지만, 사실은 서로를 떠나서는 삶도 죽음도 모두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또다른 반가사유상은 이 둘을 합친 것 같다. 반가사유상인 것 같은데 상체는 일부가 죽음을 상징하는 듯 해골로 되어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이 하나로 압축되어 있는데, 그래서 제목도 <Life & Death>이다. 사유하는 인간이 “생각 상(想)”자의 틈에 있다보니 그 삶과 죽음이 꼭 육체의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우리의 생각이 얼만큼 살아있는가, 죽어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 더 실감이 간다. 이와 유사하지만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고행_불>인데, 이 작품도 고행으로 마른 육체의 부처와 일반적인 부처의 몸이 서로 중첩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6년간의 석가모니의 고행은 실패한 수행이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고행을 버렸다. 그러나 간다라의 고행상은 걸작으로 남았다. 석가모니의 6년간의 고행수행은 정말 쓸모없는 시간낭비였을까? 이 작품은 마치 모든 실패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위로의 메시지 같다. 석가모니의 고행수행은 결코 잃어버린 6년이 아니라, 아마도 이 역시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 중의 하나였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는지.


  마치 천공의 성 같은 <사유_일월오봉도> 역시 <중생의 꿈>과 <사유>가 결합된 것이다. 전통 속의 일월오봉도가 유토피아라면, 이 작품 속의 일월오봉도는 마치 원시림의 모습처럼 어딘가 존재하는 실재처럼 다가온다. 황체상 작가는 이렇게 꿈을 현실로 보여주는 예술가다. <오방사계삼신불>에서도 전통적인 비로자나삼신불과 금강역사상의 아래에 함께 묘사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용과 동물들의 표현은 부처의 세계가 곧 현실의 세계임을 일깨워준다. 황체상 작가의 정체성 같은 것이다. 어떤 경우는 마치 내면의 치열한 수행처럼 끓어오르는 것 같은데, 반면 캐릭터화된 <사신도>에서는 네 신들이 우리에게 마치 좀 쉬면서 가도 괜찮다는 듯 우리를 위로하는 것 같다. 수행도 사실 그 자체가 지친 영혼을 쉬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불화의 기법만 빌린 현대미술 작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불교가 숨어있다. 부처도 숨어있고, 깨달음도 숨어있다.

 

 

주 수 완 (우석대학교 경영학부 예술경영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