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파도 꽃길

무우수갤러리 기획전 K-ART Ⅲ 

김봉준 초대전



2022.8.3~2022.8.15  무우수갤러리 3-4F




고달파도 꽃길, 조각 전시를 열며


나는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1980년 2월 졸업 후 대학에서 4년간 하던 인체 모델링을 못하게 되 면서 이상한 금단현상이 나타났다. 내게 인체는 이미 미적 탐닉의 이미지가 되어 있었다. 특히 조각모 델 여체를 갑자기 못 보게 된 것이나, 소조용 점토 흙을 주물럭거리지 못하는 것이나, 시국사범으로 쫓 기며 묶인 삶처럼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나 나에겐 모두 다 금단의 시대에 혼자서는 어쩔 수 없는 절망 감이고 좌절이었다.

좌절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나에게 살, 흙, 숨은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의 원형이미지 같은데 내 청춘 의 꿈결은 포말처럼 사라져버렸다. 골방에서 겨우 할 수 있는 창작미술은 목판화라서 화단에선 판화 가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다시 기어이 돌아가리라 다짐했건만 현실은 냉혹하고 처절하기까지 했다. 절 벽 같은 단절을 제치고 살, 흙, 숨의 예술 향기를 찾기에는 너무나 현실이 엄혹했다. 피투성이 청춘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나는 드디어 40년 서울 살이를 포기하고 원주 일당산자락으로 기어들었다. 맨 땅에서 살, 흙, 숨을 다시 찾으려 했으니 지금도 그 해가 잊혀지지 않는, 1993년 한여름이었다. 나는 트 럭에 싣고 온 미술자료와 연장들을 함바집에 쌓아두고 집 지을 건축 자재부터 실어 나르며 집짓기부 터 했었다. 의사 강영석 원장님(전 동북아평화연대 이사장)이 내게 후원한 두메산골 맨땅에서 처음부 터 다시 시작했다.

나의 절망은 싱그러운 숲 바람이 조금씩 씻어주었다. 살, 흙, 숨이 결합하는 연금술 같은 예술창작을 기 대했으나 그게 맘대로 쉽게 되나…. 놓아버린 조각 헤라가 익숙해지고 점토가 손에 붙기까지 또다시 칠 년을 준비해야 했다. 익숙해진 목판화와 붓그림부터 일단락을 지어야 했다. 《붓으로 그린 산그리메 물소리》 《숲에서 찾은 오래된 미래》 두 권의 책으로 붓그림과 목판화의 전통계승과 창작론을 정리했 다. 그리고 덜컥 찾아온 저승사자! 나는 아직 이승을 하직하기에는 젊다고 완강히 버텼다. 1999년 일 년의 투병생활은 나를 생사의 경계에 세웠다. 삶을 성찰한다며 하늘에 엎드려 빌었고, 목숨처럼 찾아 온 영성을 붙잡고 조용히 다시 흙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아주 이상한 영적 체험을 하던 해였다. 여 기서부터 내 조각이 슬슬 풀렸으니 그때 시작한 것은 사람 소조가 아니고 키우며 놀던 동물들이다. 염 소, 개, 닭, 오리, 거위, 닭을 키웠고 소, 당나귀, 수달, 삵, 두껍이, 후투티…. 나는 이들과 놀며 바라보며 병마를 동물치유로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근본적인 미적 의문을 화두 삼아 하나씩 풀어나갔다.

•왜 나는 지금까지 사람 조각 공부만 하고 동물은 조각의 주제로 삼지 못했지?

•왜 역사는 인간 간에 갈등이 생기면 대립과 투쟁의 변증법적으로만 발전한다고 하지?

•왜 나는 모더니즘 미술을 따라가며 추종하듯 미술창작을 해야만 하지?

이 세 가지 질문은 절망 같은 예술의 길에서 풀어야만 하는 선행 과제였다. 이렇게 시작한 자문자답이 오늘 전시로 답하게 되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조각 주제를 사람에서 생명으로, 변증법적 세계관 에서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모더니즘에서 탈모더니즘으로 문명전환을 증명이라도 하듯 답했다.  이 세 가지 길은 서로 얽힌 채로 내 안에선 하나의 길이었다. 세상을 어떻게 보고 행동하고 실천하느냐, 학예 일치(언행일치)의 행보로 새 길을 모색했다.

나는 예술가 이전에 장인이다. 조선의 장인정신부터 배우고, 익숙하게 내 몸 속에 모시고 싶었다. 조선 의 붓이 고구려벽화로부터 왔음도, 조선화의 주류가 민화·불화·풍속화·진경산수화·초상화란 것임도, 나의 흙조각을 서구모더니즘 조각보다 조선조각 전통의 계승에 두고 있음도 증명하고자 했다. 그 증 거가 오늘의 전시이고 싶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는 그다음 문제이다. 어떻게 그리고 만들 것인가 가 먼 저였다. 예술형식이 목숨처럼 소중한 것은 창작 예술인의 숙명이다. 말의 개념보다 어투다. 소통의 방 식을 먼저 공부하고자 했다. 숲으로 간 한 예인은 근본부터 공부하기를 시작하며 겨우 세 고개를 넘었 다. 목판화 고개, 붓그림 고개, 질조각 고개다. 오늘은 질조각 고갯마루에서 나를 돌아본다. 이번 전시 는 그런 것이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조각의 개념부터 다시 세워야 했다. 학예 일치 행보대로 예술행을 하면서 길을 묻 고 말로 정리하는 버릇은 네 권의 책을 쓰면서 생겼다. 서양의 소조 테라코타와 달라서 다른 이름을 붙 인다. 내가 낳은 자식에 서양 아이 이름 붙일 순 없는 것이다. 테라코타가 아니라 질조각이다. 빗재가마 장인의 질항아리 판축기법에서 배운 흙 쌓아올리기 기법이나, 가마소성 950도를 넘는 흙채색기법이 나, 즉흥성을 살리는 직조로 타래쌓기가 테라코타와 다르다. 이 땅에서 이 시대 새로 창조되어 온 예술 들을 있는 그대로 봐주었으면 좋겠다. 마당극, 창작판소리, 민중미술, 민중노래, 마당예술, 풍물굿, 시국 춤, 담시, 비나리, 질조각 등은 영문 표기도 우리말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 저마다 다 문화 운동 속에서 필연성을 갖고 태어난 한국의 창조적 현대예술개념들이다.

나는 모더니즘미술을 가르치는 미술대학에서 공부했으니 로댕 브르델 마이올을 따라하는 모델링 공 부를 한다고 했다. 그래놓고 다시 벗어나려고 애썼다. 모더니즘미학을 감당하고 경계하며 대안을 찾아 길 잃은 전사처럼 헤맸다. 탈인간중심주의, 탈오리엔털리즘, 탈이원론적 세계관의 예술행이었다. 근거 는 자기 민족전통을 긍정적으로 학습 해석 재창작하는 것에 두었다. 여기서 만난 것들이 탈, 불화, 마애 불, 민화, 조선풍속화, 진경산수화, 조선서필 학습이다. 인문학과 장인학적 접근을 같이하였다. 책 공부 야 기본이지만 이것만으론 전통 집의 속을 잘 알지는 못한다. 그 집 안살림을 알아야 진짜 그 집 문화 를 안다. 된장·간장·김치맛 내기, 주방 요리하기, 난방과 환기구조 알기, 아이들 키우기와 청소하기 등 그 집의 살림을 알아야 그 집 문화를 진짜로 알고 사용하듯이 전통예술 공부는 장인전통으로부터 배워 야 한다. 그중에서도 나의 공부 핵심은 고구려 벽화로 이어지는 겨레 붓그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 선 도공의 질항아리와 이어지는 질조각 공부였다. 자기 민족전통예술의 긍정적 학습에 사십 년 세월을 보낸 샘이다. 이제는 학습한다고 말하지 않으련다. 나는 전통을 배워 모시고 창작으로 거역한다. 전통 의 비의祕儀를 모시는 것이니 내림이고 다시 거역하는 것이니 창작예술이다.

예술에서 탈모더니즘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백낙청 선생 말씀대로 우리에게 모더니즘은 “감당 하면서 극복하기”다. 역사는 무턱대고 건너뛰기가 불가능하다. 적응하면서 극복하는 이중과제를 나의 예술에서도 겪어내야만 했다. 이 경로를 현실로 감당하게 한 것은 바로 문화운동이었다. 민과의 소통 인 민중문화운동으로 감당하면서 대안의 생명사상과 생명문화로 극복하기였다. 모더니즘에서 휴머니 즘의 미를 배우면서도 인간중심주의 미학은 경계했다. 신산고초를 겪으면서 삶에서부터 우러나는 신 명의 미를 찾아나섰다. 김지하 선생 말씀처럼 “생명에너지의 확대된 자아”로 신명의 미를 준거 삼았다. 생명에는 다 마음이 있고 영혼이 있다는 아시아 범신론, 동학의 물아동포物我同胞 사상과 인내천 신인 합일의 일원론에서 탈모더니즘의 인식론적 근거를 찾는다.

여기 모아온 소조들은 관람자가 보기 편하게 정리했다. 무우수 전시장 3층은 ‘간절한 살림’인데 고달픈 생명의 간절한 실존을 직관한 것이다. 4층은 ‘간절한 나라’로 과연 나라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동 이문명 르네상스를 화두로 궁리해 왔다. ‘동북아평화연대’ 등 시민운동단체에서 이십여 년 활동하면서 내가 바라는 나라는 근대국가를 너머 생명과 더불어 사는 세상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인간과 생물이 생명계를 이루며 생명공생의 나라를 꿈꿔왔다. 생명의 질서가 불문율로 다스리는 나라다. 오늘날 기후 위기는 세계지배권을 인간계에서 자연생태계로 권리이양을 하라는 경종이다. 아니 이미 코로나 시대 를 닥치며 생명 유지권은 미생물 생명계로 강제 이양되버린 것 같다. 인류만 모르게 점점 지구위기는 다가오고 있다. 북극·남극 빙하가 녹고, 해수면 상승으로 해변도시가 바다에 잠기고, 꿀벌이 사라지며 꽃은 수종을 못한 채 열매를 잃고 있다. 생명 살리기가 예술의 목적이 될 수밖에 없는 시대다. 지구 위기를 직관하는 ‘간절한 나라’는 절박한 생명들의 율여로 보았으면 좋겠다.

이제 나도 그림이나 조각이나 판화가 끝물에 다다른 듯하다. 그동안 많이 그리고 만들었다. 어떤 이는 내 판화 그림이 어눌하다고 하고 조각은 우화적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렇게 보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내 미술 변론을 한 대목만 해두고 싶다. 나는 나의 미술이 뚝배기 장맛 같은 ‘구수한 맛’이 라 말하고 싶다. ‘구수한 큰맛’이란 말은 고유섭 선생이 조선의 미 특징을 표현할 때 쓴 것이다. 내가 좋 아하고 배우려 했던 미감도 장터에서 만나는 이웃 주민처럼 수더분한 소박미다. 화려하게 가꾼 화초보 다 숲에서 만나는 야생초를 닮고 싶었다. 내 미술은 마을 민가에 어디다 놓아두어도 있는 듯 없는 듯 생 활 속의 미로 스며 있는 민간미술이기를 바라왔었다. 내 조각이 장독대나 뜨락 어귀에 던져 놓아도 요 란하게 튀거나 야하게 뻐기지 않는 질박한 질조각이면 된다. 오래도록 질리지 않고 우리의 입맛을 잡 고 있는 깊은 장맛처럼 내 미술도 그러길 바랐다. 여기 산골살이 하면서 잡은 미적 화두니 바람대로 되 었다. 사십 년 공부 삼십 년 정성이다.

조형 상징으로 ‘다시 나라 만들기’는 중국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동이문명 르네상스의 탐색이다. 모더 니즘을 감당하면서 넘는 생명사상 생명문화의 조형 대안으로 내놓고 싶었다. 전통을 모시면서도 창작 으로 거역하는, 모더니즘을 비판적 수용은 하지만 생명살이 중심을 잃지 않는, 배우지만 추종하지 않 는 ‘이중모순의 진리’가 내 예도이다. 한류도 한국 민주주의에서 나온 것이니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계 의 젊은이들은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하며 풍기는 한류의 매력을 알아차렸다. 아시아 동쪽의 작은 나라 문화의 힘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동북공정 문화공정이 드세고 일본의 질투 심이 유치한 복수로 반격한다. 그래서도 한류의 기초예술(K-ART)이 중심 잡고 더 잘해야 한다. 한류는 우정민주주의가 꽃피운 세계의 희망이다.

‘간절한 살림’, ‘간절한 나라’ 이 두 주제를 묶어 <고달파도 꽃길>이라는 전시 제목을 내놨다. 좀 엉뚱 한 제목처럼 들리겠지만, 삶은 울고 있지만 예술창작은 웃는 웃픈 내 역설의 예술행을 그대로 깃발로 들었다. 이번 전시는 제목 그대로 간절하다. 전시 소개를 해주신 이태호 교수님, 초대해 주신 무우수갤 러리에 정중히 감사드린다.


- 김봉준, 조각가, 화가







김봉준의 40년 예술 여정


김봉준은 본디 1970년대 후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였다. 재학시절부터 민속문화 연구회를 이끌며 탈춤에도 심취했다. 양주탈춤의 노인들을 찾아 직접 춤과 풍물을 전수했고, 당시에 동참했던 탈춤반 풍물패가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한 축으로 꼽히는 ‘두렁’으로 연계되었다. 1982 년 ‘두렁’을 창립해 목판화, 벽화, 걸개그림, 붓그림과 한글 쓰기 등 민중의 삶에 살아있는 ‘산 그림’ 작 업을 추구했음은 초기 민중미술 운동의 선도였다.(《산 그림》, 미술동인 두렁 그림책 1집, 1983.) 

이때 보통사람의 눈높이와 함께 개설했던 애오개 미술교실은 뮤지엄 체험학습의 효시이자 본보기라 할 만하다. 이 과정에서 민화, 불화, 수묵화, 고구려 고분벽화, 도자기나 옹기, 석조불상이나 불탑, 무속 화나 민속 조형물 등 전통미술의 형식적 장점에 확신하였다. (민중미술편집회, 《민중미술》, 도서출판 공동체, 1985.) 이후에도 김봉준은 축제 형태로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미술교육의 체험학습과정을 늘 중시했다. 가르치며 배우는 자세로 대중의 심성과 미의식을 공유하며, 이 마당의 신명을 기반으로 삼 은 민중성은 김봉준 예술의 원천이랄 수 있겠다. 

김봉준은 무엇보다 민중의 생활사에 담긴 구비문학이나 민속의 상징체계에 주목했다. 제주나 강원 지 역에 구전하는 마을 이야기에서 한국의 민족 신화로 확대하였다. 국내는 물론이려니와 동북아시아 신 화로 눈을 돌렸고, 나아가 북아메리카나 서아시아, 시베리아, 지중해 등 세계 신화의 순례지를 찾아 발 품을 팔았다. 1980년대 후반 미국에 한인마을 풍물교사로 갔을 때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문화의 만 남에서 시작해,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신화 여행을 떠났다. 

동북아평화연대(2001년에 창립된 동북아평화연대는 북방동포 지원을 위한 모임으로 시작한 NGO) 의 문화위원회를 조직해서 프로젝트로 신화답사를 진행했다. 그는 2005년시베리아대륙을 자동차로 일주하는 ‘유라시아 빛’ 랠리 단장도 한 적이 있다. 신화기행 때 그린 외국여행 스케치도 눈여겨볼 만 하다. 여기서 우리 땅의 솟대나 장승을 닮은 시베리아의 조형물을 발견하며 동이(東夷) 문화와의 유 사성이나 그 원형의 동질성을 발견하고, 인간 삶과 역사에서 형성된 지역별 신화 체계의 보편성을 찾 게 됐다고 한다. 동시에 신화학이 인간을 바탕으로 하는 인문학의 시작이자 마무리이면서 중심이라 는 확신을 다졌다. 

답사를 거듭하고 글을 쓰는 가운데, 이처럼 신화 세계에 새로이 눈뜬 것이다. 동시에 이들이 현재 인류가 처한 여러 모순을 해결할 대안으로 ‘오랜 미래’임을 수긍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화와 예술의 통 섭, 그 상징에 담긴 영성과 평화의 연관성을 터득했다. (김봉준, 《신화순례》, 미들하우스, 2012.) 김봉준 에게 신화와 상징은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 이후 찾은 돌파구랄 수 있겠고, 1990년대 포스트-민중미 술의 새로운 한 갈래라 여겨진다. 

이런 생각을 구현할 공간으로 작업실이 있던 2008년 문막읍 진밭마을 안쪽 인적이 드문 저수지의 끝 자락 산골짜기에, 인류의 평화라는 김봉준의 꿈을 담은 ‘오랜미래신화미술관’을 2008년 설립했다. 오 랜미래신화미술관에는 그동안 작업해온 판화부터 조각까지 다양한 내용과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신 화시대와 영성시대가 도래할 거라 예견하며 오랜 미래의 신화적 상징을 추구한 김봉준의 예술 세상 이 펼쳐져 있었다. 

신화의 내용에 맞추어 창세, 마을, 건국, 토템, 여신, 동이 문명신화 등으로 구분해 전시장을 채웠다. 유 화나 채색화의 신화 그리기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나타난 춤이나 해신과 달신 등의 도상을 응용하기 도 했다. 또 신상에는 복식 차용과 함께 무속화의 정면상을 따른 퀭한 눈 표정의 인물화법이 눈에 띈 다. 특히 무표정한 인물 표정은 시대의 감정이면서 김봉준의 자화상답기도 하다. 유화 <고려인 강제이 주>(2004)나 <맞섬 아리랑>(2015) 등으로 이어진, 약간 괴기스런 이미지는 김봉준이 해석하는 먼 옛 날 신화의 분위기와 어우러진다.  

단군과 관련한 고조선 신화를 비롯해 고구려나 신라의 건국신화, 대지의 어머니 아버지 신화, 도깨비 신화, 저승길 신화 등 열 개 주제에 맞추어 조각상을 배열해 구성해 놓았다. 수묵이나 유채의 붓그림과 더불어 질조각로 제작한 조각상은 신상임에도 위엄이나 숭고함보다 김봉준의 기존 판화나 붓그림과 다름없는 어눌함과 친근한 해학이 물씬 넘친다. 인류의 출현을 알라는 남자여자상, 누이나 어머니로 표 상되는 여성 신상은 물론이려니와, 토템 신앙과 관련된 곰과 호랑이, 소, 말, 개, 염소, 닭, 새, 나비, 물고 기 등이 그러하다. 이런 동물조각이나 부조의 형상미는 기존 판화나 붓그림의 서정과도 상통해 있다. 특히 흙을 판처럼 늘여 타래미를 만들어 타렴질하는 전통적인 옹기 방식을 활용한 점도 김봉준답다. 

* 이태호, <김봉준의 40년 예술 여정, ‘붓 굿’>-‘오월의 붓굿’ 전시에 부침(《김봉준 신작전-오월의 붓굿》 (광주정신 메이 홀, 2019. 5. 8.~5. 31.)에서 발췌.


- 이태호,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다산 숲 아카데미 원장